백제역사유적지구  웅진시대(공주)  공산성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인이 아끼고 보존하는 세계유산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서브비쥬얼

금제관식 (무령왕릉 출토) 금제뒤꽃이(무령왕릉 출토) 허리띠장식(무령왕릉 출토) 금동제신발(무령왕릉 출토)

공산성

공산성

백제가 웅진에 수도를 두었던 475년부터 부여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약 63년간 왕성은 웅진성이라 불리었는데 지금의 공산성이다.
공산성은 공주시 금성동·산성동에 걸쳐 있는 약 20만㎡ 규모의 거대한 산성이다.

공산으로 불리는 산은 남쪽으로 공주 시가지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금강의 물줄기와 접한다. 동남쪽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지 외곽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전체가 병풍이 돌려진 천연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공산성은 산봉우리를 연결하고 계곡을 가로질러 성벽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강화한 전형적인 방어용 산성이다. 이 안에 왕궁을 비롯한 중요 시설들을 배치하였다. 공산성은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체계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 축조양상, 왕궁지 및 왕궁 부속시설지 등이 발견되면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이하에서는 공산성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유구들에 대하여 백제시대 유구를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성곽

만하루 부근 성곽 길

성체 총길이 2,660m(석성 1,925m, 토성 735m). 공산성은 토성구간과 석성구간으로 구분된다. 대부분이 석성구간인데 처음에는 토성을 쌓았지만 나중에 여러 차례 고쳐 쌓으면서 석성으로 변화되었다. 토성은 동쪽 구역의 내·외성으로 구분된 범위에 위치한다. 이 중에서 외성 구간은 백제시대에 쌓았던 토성으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공산성은 거의 석성으로 남아 있고, 대부분 조선시대에 쌓은 것이지만, 부분적으로 백제시대에 쌓았던 석성의 흔적도 발견된다. 성곽의 현황을 통해 최초 백제시대에 토성으로 쌓았고 부분적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 후 본격적으로 석축으로 쌓는 개축과 보축의 과정이 있었다.

왕궁지

왕궁터

왕궁지 유적은 공산성 내부에 솟아 있는 표고 110m 정도의 산봉우리 두 개 중에서 서쪽 산봉우리 정상의 면적 약 7,000㎡ 규모의 광장에 자리한다. 이 곳은 공주 시가지와 금강, 그리고 왕릉인 송산리고분군 등이 한 눈에 조망되는 위치에 있다. 1985년의 발굴조사 결과 넓은 범위에서 백제시대의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유구는 대부분 건물지와 그 부속시설들로서, 동서 35m, 남북 20m 정도의 대형 대벽건물지와 여러 채의 굴립주 건물지, 왕궁 내에서 필요한 용수조달 시설인 연못과 저장시설 등이다. 유적에서는 기와와 청동 거울, 다양한 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다양한 와당들은 높은 위계의 건물이 존재하였음을 증명해 준다.

왕궁부속시설지

공산성 내부에서 성안마을로 불리는 지역은 북쪽의 금강 변에 위치한 계곡 사이의 분지상태로 남겨진 약 40,000㎡ 규모의 공간으로 산성 내에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공간이다. 왕궁부속시설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8년에 시작되었고, 2011년과 2012년에는 백제시대의 문화층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었다. 현재까지 진행된 백제시대의 유구 조사는 약 6,300㎡ 정도이다. 백제시대의 문화층은 현재의 지표면 보다 깊게는 7m, 얕게는 4m 정도의 깊이에서 확인되며 그 위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이 층층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조사 결과 백제시대 건물지, 축대, 계단지와 도로, 저수시설과 배수로 등의 유구가 노출되었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공간을 구획한 후 축대를 이용하여 대지를 조성하고 각각의 대지에 건물을 축조한 모습이다. 건물지는 2채의 기단 건물지를 비롯하여 대벽건물지와 굴립주건물지 등인데 왕궁지의 부속시설물인 것으로 판단된다.
왕궁부속시설지에서 노출된 백제시대 유구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저수시설이다. 저수시설 내부에서는 옻칠된 가죽 갑옷과 철제의 찰갑, 마갑(馬甲), 대도(大刀) 등이 출토되었다. 옻칠된 가죽 갑옷은 매우 고급스럽고 화려한데 원래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옻칠된 갑옷 위에 붉은 색의 글씨가 세로 방향으로 쓰여져 있다. 그 중 ‘정관 19년 4월 21일’ 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해는 645년 이다. 이 갑옷은 백제에서 생산되는 황칠수에서 채취한 칠을 한 갑옷으로서 고대 한국과 중국의 역사책에 의하면 백제는 당나라에 명광개를 만들어 수출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갑옷이 명광개의 실물일 가능성이 높다. 양국이 큰 전쟁을 치르기 전에 서로 교류하였던 명백한 실물자료가 지하에서 출토된 것이다. 마갑은 백제지역에서 처음 출토된 것으로 말에게 갑옷을 입히고 그 위에 중무장한 기병이 당시 전쟁에서 활약하던 모습을 보여준다.

기타 산성 내 백제유구

왕궁지의 북쪽 사면을 비롯하여 서문 부근 등의 평탄한 대지에서는 다수의 건물지와 저장시설, 연못 등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