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유적지구  사비시대(부여)  정림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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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비쥬얼

금제관식 (무령왕릉 출토) 금제뒤꽃이(무령왕릉 출토) 허리띠장식(무령왕릉 출토) 금동제신발(무령왕릉 출토)

정림사지

정림사지

정림사지는 부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동쪽으로 금성산, 북쪽으로 부소산에 둘러싸여 있다. 정림사지 인근 지역의 표고는 서측과 남측 대부분의 평탄지는 0~14m의 표고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정림사지 인근 지역의 경우 표고 약 30m 이하의 지형이 분포하고 있다.

정림사지를 중심으로 북측 부소산과 동측 금성산의 경우 표고 약 120m 내외의 지형이 분포하고 있다. 사비시대 수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찰은 단연 정림사였다. 정림사지에 우뚝 서있는 석탑 표면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왕조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정림사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정면

정림사지의 대지는 북동에서 남서로 경사진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높은 북동쪽은 깎고, 낮은 서남쪽은 성토하여 조성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정림사지 사역의 남편과 서편은 원래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사역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낮아 사찰의 위용이 한껏 과시되었을 것이다.
정림사지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중문, 금당지, 강당지 및 그 북·동·서편의 승방지, 회랑지 등이 확인되었다. 회랑에 접속된 북·동·서 승방지의 배치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독특한 모습으로 백제지역에서만 나타난다.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예불대상이 되는 불상이 안치되는 금당과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는 탑이다.
탑과 금당간의 관계에 따라 <1탑-1금당>, <1탑-2금당> 등의 가람배치양식을 구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림사지는 강당과 승방지, 그리고 회랑으로 둘러진 공간 내에 탑과 금당을 일직선상에 배열하는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시대의 사찰터로서, 각 건물들은 기와로 쌓은 기단 위에 건축된 목조의 기와 건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전체 사찰지의 규모는 북승방지에서 중문지까지 107m이며, 폭은 동서건물지 외곽 기준으로 62m이다. 두개의 연못지가 중문지 남쪽에서 발굴되었다.

정림사지에는 높이 8.3m의 석탑이 있는데, 대한민국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기단을 낮게 사용하고 1층 탑신을 높게 설정하면서도 2층부터는 탑신의 높이와 너비를 급격히 줄여 시각을 1층 탑신에 머물게 하는 건축 기법을 이용하고 있다. 1층 탑신은 모서리안쪽으로 쏠린 기둥을 세우고 그 내부에 각면 2매씩의 판석(板石)으로 짜 맞추어 마치 두 쪽 문을 달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얇은 지붕돌은 각 층마다 약간의 경사를 주면서 옆으로 길게 뻗어나가다가 지붕의 1/10 지점에서 끝이 살짝 올려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기단부터 5층 지붕돌까지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으나 상륜부는 노반석의 일부만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유실되었다. 조사 결과 상륜부를 고정시켰던 찰주 구멍이 5층 지붕돌까지 뚫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석탑이 전체적으로 안정되며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보다도 비례의 완벽성에 있다. 정림사지석탑을 정확히 실측하여 수리적 원리를 얻고자 한 사람은 일본인 건축학자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였다. 그의 측량에 의하면 정림사지 석탑의 건립에 쓴 자[尺]는 1자의 길이가 약 35㎝ 정도인 '고려척'이었다. 그는 탑의 지대석 너비가 고려척으로 14척이고,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에 기본 척도로 쓰였다고 단정하였다. 이러한 증거들은 각 부분의 측량 결과 사실로 드러났는데 1층 탑신과 1층 지붕돌을 합한 높이가 7척이며, 1층탑의 너비 역시 7척, 기단의 높이는 7척의 반인 3.5척, 기단 너비는 7척에서 3.5척을 더한 10.5척이었다. 말하자면 7척이 가진 등할적(等割的) 원리로 이 탑이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탑의 세부를 살펴보면 1층 너비인 7척에 대하여 2층과 5층의 합이 7.2척, 3층과 4층의 합이 7척으로 거의 7척에 맞춰진다. 이러한 원리는 탑의 높이에도 적용되어 탑신과 지붕돌을 합한 1층 높이 7척에 대하여 2층과 5층의 합이 7척, 3층과 4층의 합이 6.9척으로 거의 7척에 맞춰진다.

정림사지에서는 발굴결과 수많은 기와와 흙으로 만든 인형의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흙으로 만든 인형은 당시 중국 북위의 수도에 있었던 영녕사(永寧寺) 출토품과 제조기법과 형태가 상당히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