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유적지구  시대별유적  시대별유적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인이 아끼고 보존하는 세계유산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서브비쥬얼

금제관식 (무령왕릉 출토) 금제뒤꽃이(무령왕릉 출토) 허리띠장식(무령왕릉 출토) 금동제신발(무령왕릉 출토)

시대별유적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700여년간 존속한 한국의 고대국가이다.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의 소국에서 시작하여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을 통합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백제는 자의 및 타의에 의해 2차례에 걸친 천도를 단행했는데, 수도의 소재지에 따라 한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로 구분한다. 한성시대를 전기, 웅진·사비시대를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성은 오늘날의 서울, 웅진은 충남 공주, 사비는 충남 부여에 해당한다.
신청유산은 백제 후기의 수도 관련 유적이다. 즉 웅진·사비시대의 유적이다. 시기적으로는 475년에서 660년까지(5~7세기) 약 200여 년간의 시기에 해당된다. 백제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도시는 통치와 관리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탄생하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수도들은 한 나라의 정치·경제·종교의 중심지이며, 그 나라의 수준을 보여주는 문화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고대 동아시아의 수도 내 여러 시설 중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왕성, 사찰, 그리고 능묘이다. 왕성은 왕의 통치 공간과 생활 공간으로 구성되었으며, 통치의 편의를 위해 복도를 두기도 하였다. 사찰은 수도 내외에 위치하면서 통치자들의 통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고,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능묘는 수도의 밖에 인접하여 입지하면서 앞 시기 최고 권력자였던 선왕과 현재 최고 권력자인 왕을 매개해 주며, 왕실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보장해주는 공간이다.
신청유산은 웅진시대 수도 관련 유적인 공주 지역의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사비시대 수도 관련 유적인 부여 지역의 부소산성과 관북리유적, 나성 및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사비시대 후기 수도의 기능 보완을 위해 조성되었던 복도 관련 유적인 익산 지역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이다. 신청유산을 성격별로 구분하면, 표와 같다.

신청유산을 성격별로 구분한 표
왕궁 사지 왕릉 도시방어성
웅진시대
(공주)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사비시대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부여나성
사비시대후기
(익산)
왕궁리유적 미륵사지

웅진시대(공주) 수도관련 유적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인 한성이 함락된 후, 백제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성을 포기하고 오늘날의 공주(서울에서 약 130Km 남쪽에 위치)인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공주으로 천도할 때 가장 중요시했던 입지 조건은 방어적 요소였다. 백제의 공주 천도는 기본적으로 고구려가 침입하여 수도가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후에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공주 지역은 금강의 중류 상에 위치한 마름모꼴의 분지형 지형을 띠고 있다. 동부는 계룡산지가 남-북으로 크게 펼쳐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남쪽과 서쪽 역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개를 통과하지 않고는 공주으로 쉽게 진입할 수 없다. 즉 공주지역은 동·서·남쪽은 산지가 가로막고 북쪽은 금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면서 가로막고 있다. 이러한 지형은 백제가 당면한 고구려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공주 지역이 최적지로 판단된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이 공주 지역의 입지는 방어에 유리한 지세에 중점을 둔 수도의 입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역은 수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과 개방성 등은 약화되었으며, 이는 후에 다시 부여로 천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웅진지역은 지금의 공주시가지를 가로 지르는 제민천(濟民川)에 의해 동서로 양분된다. 제민천과 금강의 합류지점은 홍수 시에 침수의 위험이 있는 저습지였으므로 공주 시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웅진시대의 수도 범위와 관련하여 오래전부터 외곽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고고학적 조사 결과 웅진시대에는 외곽성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수도의 범위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능묘의 분포범위를 참고할 수 있다. 능묘구역이 수도 바깥에 배치되는 구조가 확실히 보이는 것은 사비시대지만 이러한 인식은 웅진시대에도 존재하였다. 공주 시가지 주변의 능묘군은 동쪽으로는 금학동고분군, 서쪽으로는 송산리고분군 등이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고분군 안쪽의 공간 범위를 당시의 수도 범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비시대(부여) 수도관련 유적

538년 백제는 오늘날의 부여(공주에서 약 35Km 남서쪽에 위치)인 사비로 2차 천도를 단행한다. 이후 신라와 당 연합군에 패망하게 되는 660년까지 123년 동안의 사비시대가 열린 것이다. 공주로 천도할 때 가장 중요시했던 입지 조건이었던 방어적 요소는, 6세기 초반 거듭되는 고구려와의 전승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상당 부분 약화되었다. 부여로의 천도를 단행한 성왕(聖王)(재위 523~554)은 선왕인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대의 성공적인 국가경영의 성과를 더욱 발전시키고, 기득권을 지닌 귀족 세력들의 견제를 통한 왕권 강화를 위하여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공주 분지의 면적은 10㎢로 수도가 입지하기엔 협소한 지역이었다. 공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넓은 개활지(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의 면적은 약 20㎢를 상회한다)가 있어 부여 지역이 인구수용에 유리하다는 조건도 천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부여 지역은 밀물 때에는 바닷물이 도달하는 지역으로, 대형 선박이 별다른 동력 없이 조수의 힘만으로 오고 갈 수 있는 지역이다. 이 점은 물자의 유통과 문물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인이다
그렇다하여 부여가 방어에 취약한 자연지형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부여의 북·서·남으로는 금강이 휘감아 돌면서 자연적인 방어막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도 험준한 편은 아니지만, 보조적인 방어시설을 설치할 경우 수도의 방어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해발 200m 내외의 산지들이 연달아 분포하는 지형이다. 백제는 부여 동쪽 방면의 방어력을 높이고자 수도의 외곽을 두르는 외곽성인 부여나성을 축조하였다.
백제는 공주가 가진 수도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538년 부여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부여는 왕궁과 그 배후에 후원이자 유사시 피난성의 기능을 수행한 산성이 세트를 이루는 왕성이 금강에 인접한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왕성을 포함한 도시 전체를 외곽성인 부여나성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이다.
부여지역의 수도 관련 유산도성에 대해서는 30년이 넘는 장기간에 걸쳐 정밀한 고고학적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왕궁으로 여겨지는 대형건물지 및 수도 내 사찰터, 나성, 능묘 등 1500년 전 백제의 수도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사비시대(익산) 수도관련 유적

백제의 제30대 왕인 무왕(武王)(재위 600~641)은 익산(부여에서 약 50㎞ 남쪽에 위치)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재위 기간 미륵사의 창건 등 적극적인 익산 경영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무왕 대의 익산 경영은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한 귀족세력의 견제를 통한 왕권 강화와 대 신라 전쟁 수행 등을 위해 전략적 거점인 익산의 경영을 통해 백제 남방지역의 확고한 장악력 확보 등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금강, 만경강 등의 수운과 바다와 지극히 가까워 수상교통이 발달할 수 있는 이점과, 남쪽으로 전주, 임실, 남원으로 이어지는 육상교통로의 요지라는 입지는 익산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익산을 포함한 주변의 논산, 완주, 김제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탁월한 농업생산력을 고려할 경우, 백제 시기에도 이 지역의 농업생산력은 타 지역에 비해 월등하였을 것이며, 이러한 경제적 동기 또한 익산 경영의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무왕 대의 익산 경영을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가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등인데, 백제 후기의 주요 유적들은 미륵산(해발 430m)과 용화산 자락(해발 340m) 남쪽의 선상지 및 저평한 구릉 등에 분포한다. 이러한 지리적, 역사문화적 환경 등은 익산지역에 사비시대 수도의 기능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복도 등이 입지할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