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의 역사  백제의 건국과 성장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인이 아끼고 보존하는 세계유산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서브비쥬얼

금제관식 (무령왕릉 출토) 금제뒤꽃이(무령왕릉 출토) 허리띠장식(무령왕릉 출토) 금동제신발(무령왕릉 출토)

백제의 건국과 성장

백제 시조 온조는 졸본지역에서 한강유역의 위례지역으로 이동해 와서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다.

백제는 한국의 고대국가 가운데 한 국가였다. 기원 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0년 동안 31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강(현 서울)의 중하류에 위치한 소국이었지만, 점차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며 성장하였다. 한강 유역에 위례성을 쌓고 도읍을 삼은 백제는 국가의 중흥을 위해 웅진(현 공주)과 사비(현 부여)로 두 번이나 도읍을 옮기기도 하였다. 기원 전 18년부터 기원 후 475년 고구려에게 수도였던 서울을 빼앗겨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를 한성시대라고 부른다. 475년부터 공주에 도읍을 정했던 시기를 웅진시대라 부르며, 이후 538년에 성왕이 다시 도읍을 사비로 옮긴 이후부터는 사비시대라고 한다. 웅진시대와 사비시대를 거치면서 백제는 바다 건너 외국들과도 적극적인 외교 관계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을 발달시키고 우수한 문화를 꽃피워 선진문화국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660년 신라와 당의 침략으로 도성이 함락되고, 이어 3년에 걸친 치열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백제는 끝내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국가의 운명을 다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신라와 함께 한국의 고대문화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아시아의 한 국가로서 문화교류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백제는 선진적인 문화를 수용하여 이를 다시 발전시킴으로써 수준 높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들 문화를 주변국들에게 전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동아시아 문화발전에 기여하였다. 비록 백제라는 국가는 망하였지만 백제인들이 창조한 풍부한 문화는 백제의 고토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결과 백제의 왕도가 있었던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새로운 문화 창조의 토대가 되고 있다.

백제의 시작

백제의 건국과 도읍

백제는 부여계통의 여러 이주민 세력이 한강유역의 선주민과 결합하여 형성된 국가이다. 백제가 건국되기 전 한반도 남쪽에는 이미 마한이라는 나라 안에 여러 소국들이 있었다. 백제는 이러한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여 고대국가로 성장·발전하였다.
한국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기원 전 18년에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온조는 형인 비류와 함께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다가 한강 주변에 위례성이라는 성과 궁궐을 짓고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형인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백성들은 온조에게 통합되고, 나라의 이름도 ‘모든 백성이 즐겨 따랐다’라는 뜻으로 백제라고 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성장

백제가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며 연맹왕국으로 성장한 시기는 제8대 왕이었던 고이왕대(재위 234~286)부터였다. 고이왕은 246년 낙랑의 변방지역을 공격하는 등 중국의 군현세력과 대립하면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삼국 가운데 가장 앞서서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관직의 등급을 매기고(16관등 제도) 등급에 따라 옷의 색깔을 정하였다. 또한 261년에 행정기구인 6좌평을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이전보다 더욱 발전된 통치조직을 갖추었다. 그리고 대규모의 왕성을 축조하여 방비체제를 구축하였다.
백제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대였다. 근초고왕은 전라도 지역의 마한세력을 통합시키고, 가야지역까지 그 영향력을 끼치면서 점차 영역을 남쪽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저지하면서 371년에는 친히 정병 3만을 이끌고 평양성까지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 결과 근초고왕 때는 현재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를 포함해 황해도 일부지역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영역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넓어진 영역을 다스리기 위해 근초고왕은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근초고왕은 대외교류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중국 동진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신라에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며 말을 선물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는 학자와 기술자 등을 파견하여 학문과 기술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람들 가운데는 박사라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학문과 기술 등 여러 분야에 박사제도를 두어 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에게 박사라는 칭호를 주고 벼슬도 내렸다.
한편 백제는 4세기 후반부터 약 100여 년간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갈등은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백제는 고구려의 직접적인 위협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제21대 개로왕(재위 455~475)은 왕족중심의 지배체제와 대규모 토목공사 등을 진행하면서 전제왕권을 추구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중국 북위와의 외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개로왕의 정책은 내부적인 분열과 함께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남침을 초래하였다.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은 장수왕이 이끈 고구려군에게 7일만에 함락되고, 개로왕은 붙잡혀 살해당하였다. 이때 왕을 비롯해 태후·왕자 등이 몰살되었으며, 8천 명의 남녀가 포로가 되었다.

자료출처 : 충청남도. 2010. 한국의 고대왕국 백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