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유적지구  백제의 역사  백제의 중흥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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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비쥬얼

금제관식 (무령왕릉 출토) 금제뒤꽃이(무령왕릉 출토) 허리띠장식(무령왕릉 출토) 금동제신발(무령왕릉 출토)

백제의 중흥과 발전

웅진천도와 중흥

한강에서 금강으로

475년 고구려에게 한성이 함락되자 제22대 문주왕(재위 475~477)은 그해 10월에 웅진(현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웅진시대 백제는 개로왕의 죽음과 갑작스런 수도의 천도 등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문주왕은 신하인 해구에게 시해되었으며, 문주왕을 이어 즉위한 제23대 삼근왕(재위 477~479)은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이어 동성왕(재위 479~501)이 정치적 혼란 속에 제24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동성왕은 어수선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금강지역의 새로운 세력을 등용하여 한성에서 이동해 온 귀족 세력과 힘의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때 새롭게 등용된 귀족세력은 진씨를 비롯하여 백씨·사씨·연씨 등이었다. 그리고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그렇지만 동성왕은 재위 말기에 들어와 과대한 토목공사, 사치 등으로 국내정치에 소홀하였다. 결국 그는 501년 11월 마포촌(현 서천 한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가림성(현 임천)의 성주였던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상해를 입고 12월에 사망하였다.

백제의 중흥

동성왕에 이어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이 즉위하면서 백제의 국력은 점차 회복되었다. 무령왕은 즉위 후 바로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고구려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즉위 해인 501년에 고구려 수곡성(현 신계)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513년에는 위천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이 시기의 전투는 주로 한강유역에서 벌어졌는데, 대부분 승리를 거두면서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일부를 회복하게 되었다. 무령왕을 이어 제26대 성왕(재위 523~554)이 즉위하였다. 성왕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즉 중앙의 행정조직을 22부로 재정비하고, 지방의 행정 및 군사조직을 방군성(方郡城) 체제로 전환하는 등 대대적으로 조직을 정비하였다. 성왕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538년에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것이다. 이로 인해 웅진시대를 마감하고 사비에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웅진 즉 지금의 공주는 6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백제의 도읍이었지만 무령왕릉을 비롯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중심으로 백제의 우수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백제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비천도와 발전

사비시대가 열리다

성왕은 538년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백제라는 국호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공주는 지리적으로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대외적으로 진출하기에는 불리한 입지였다. 반면에 부여지역은 금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적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넓은 평야가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롭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지리적으로 금강을 통한 남부지역 및 가야지역으로의 진출과 서해를 통해 중국 및 일본과의 교류가 한층 용이했다.
성왕은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도성제도를 마련하였다. 왕성은 부소산성을 배후산성으로 하고, 부여를 둘러싸는 나성을 축조하여 이중적인 방어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도성 안은 5부(部)로 구획하고, 각 부는 다시 5항(巷)으로 세분하였다. 통치체제도 새롭게 정비하였는데, 22부사의 중앙 관부와 5방의 지방 통치조직을 완비하였다.
대내외 정책을 통해 국력을 강화시킨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고구려가 점유한 한강유역에 대한 회복에 나섰다. 551년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개 군을,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의 10개 군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553년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지역까지 점령함으로써 양국의 동맹관계는 파탄을 맞았다. 이에 성왕은 554년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전쟁 중에 적에게 붙잡혀 사망하였다.

백제인의 정신세계, 불교의 발전

백제는 중국 남조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백제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예술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특히 백제인의 온화하고 섬세한 면이 곳곳에 잘 배어 있는 곳이 불교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도에는 많은 사찰과 불탑이 건립되었고, 불교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 결과 웅진 및 사비지역에는 불교유적이 다수 남아있으며,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밖에도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등은 백제 불교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사비시대에는 각종 공예품과 미술문화도 발전하였다.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 각종 문양전, 토기와 와당 등은 백제인들의 의식세계와 기술수준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백제는 이런 우수한 문화를 일본에 전해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무왕의 익산경영

제30대 무왕(600~641)은 대내적으로 왕권을 회복하고 대외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무왕은 재위기간 중 신라와 10여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 또한 무왕은 왕도를 사비에서 익산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것은 익산에 왕궁성을 조영하고, 대규모 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한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 특히 익산 왕궁성에서는 사비도성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과 유사한 고고학적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어 상당한 기간 동안 무왕이 익산에 머물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왕은 도교와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미륵사의 창건과 동시에 왕흥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그리고 재위 35년 3월에는 궁의 남쪽에 연못을 만들어 20여리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연못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어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전해오는 산을 조성하였다.

백제의 멸망

700년의 왕국이 사라지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31대 의자왕(재위 641~660)은 태자 때 부모에게 효성스러웠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돈독했었다고 한다. 의자왕은 즉위 이듬 해 7월 자신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시키는 대성과를 거두었으며, 8월에는 윤충을 보내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켰다. 이후에도 신라의 서부지역에 대한 공략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하게 되자 어느덧 자만심에 빠져 독재군주로서의 한계성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상황은 왕비의 지나친 권력욕에 의한 국정운영을 통해 나타났다. 또한 의자왕은 당시 삼국을 둘러싼 국제관계의 변화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당시 수세에 놓여 있던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백제에 대한 압력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당에서는 백제에게 신라와 화평관계를 유지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의자왕은 이를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652년 이후 더 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당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략하였다. 백제는 계백이 이끄는 5천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신라 5만군을 저지하였으나 실패하고, 신라와 당군은 사비도성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660년 7월 12일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에 이르자 13일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북방 웅진성으로 피신하고 나당군은 사비성을 포위하여 결국 함락시켰다. 이어 웅진성으로 피신했던 의자왕과 태자도 항복하였으며, 의자왕과 태자, 여러 왕자들, 다수의 고위직 관료, 그리고 백성 12,807명은 당의 수도로 보내졌고, 백제지역에는 당에서 5개의 통치조직을 두었다.

백제 부흥의 꿈

660년 사비도성 함락이후 전국 각지에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사비도성이 함락된 직후부터 시작되어 663년 11월 예산 임존성이 함락될 때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거점은 주류성과 임존성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왜의 지원군과 함께 663년 8월 백촌강에서 벌인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부흥운동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백촌강에서 수군의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주류성에서는 백제군과 나당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백제부흥군은 663년 9월 1일 더 이상의 전투를 진행하지 못하고 왜군과 함께 신라군에 항복하였으며, 주류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주류성이 함락되자 두량윤성을 비롯하여 주변의 여러 성들도 따라서 항복을 하였다. 이로써 3년 동안의 백제의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약 700년을 이어져 온 백제 왕조는 그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자료출처 : 충청남도. 2010. 한국의 고대왕국 백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