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유적지구  웅진시대(공주)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인이 아끼고 보존하는 세계유산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서브비쥬얼

금제관식 (무령왕릉 출토) 금제뒤꽃이(무령왕릉 출토) 허리띠장식(무령왕릉 출토) 금동제신발(무령왕릉 출토)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에 있는 웅진시대의 백제왕실의 능묘군이며, 백제 왕릉 혹은 무령왕릉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강의 남안에 솟아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작은 구릉의 동남향 능선 8부 정도에 고분군이 위치하는데 표고 75m 내외 지점이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27년, 1932년에 이루어졌으며, 1971년 고분군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무령왕릉이 발견되어,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가을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발견된 백제 무덤으로는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과 전축분(벽돌무덤)이 있는데, 1~5호분은 돔형태의 횡혈식석실분이며, 백제 전통의 고분 형태이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볼트(vault)형의 전축분으로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형태이다. 이들 무덤들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하는 475년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축분 2기를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이 모두 횡혈식석실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웅진시대 백제 왕실에서는 이미 횡혈식석실분에 대하여 형식이나 구조면에서 제도적으로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왕실 전용의 무덤 양식으로 완전히 정착시킨 듯하다.
이와 같이 정형화된 웅진시대의 횡혈식석실분은 6세기를 기점으로 공주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백제의 변방 지역까지 급속하게 전파되어 지방 지배 계층의 무덤으로도 조성될 만큼 점차 사용 계층이 확대됨에 따라 대표적인 백제 무덤 양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횡혈식석실분이 구조적인 약점으로 손쉽게 도굴의 대상이 되었던 까닭에 주인과 함께 매납(埋納)되었던 부장품들이 상당량 도굴되어 당시 문화상을 밝히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점이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발견된 횡혈식석실분의 구조를 살펴보면, 무덤의 입구인 널길[羨道], 시신을 모시는 나무널[木棺], 피장자의 껴묻거리[副葬品]가 함께 안치되는 널방[玄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에는 무덤을 덮었던 거대한 봉분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봉분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무덤 내부의 규모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으나, 널길의 길이는 2m 내외이며, 폭과 높이는 1m 내외이다. 널방의 규모는 대체로 길이와 폭이 3m 내외이고, 바닥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천장의 구조는 돔형태로, 널방 벽면의 모습이 바닥에서 일정 부분까지는 수직으로 올라가나 일정 높이의 부분부터는 서서히 안쪽으로 좁아지다가 정상부에 이르면 1매의 커다란 판석을 덮어 마감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송산리고분-봄-무령왕릉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는 횡혈식석실분 외에도 2기의 전축분이 있는데, 송산리6호분과 무령왕릉이 그것이다. 두 전축분은 아치형 천정, 장방형 묘실, 동ㆍ서벽과 북벽에 설치된 복숭아형 등감이 있으며 바닥에는 ‘인(人)’자 모양으로 벽돌을 깔고 벽과 연접하는 부분의 공간은 삼각형 벽돌로 채운 점 등이 특징이다. 6호 전축분의 벽화는 전형적인 사신계(四神系) 벽화에 속한다. 전축분 내에 사신도를 그린 유일한 사례이다. 벽화는 네 벽의 벽화를 그린 위치에 진흙이나 회를 바르고 그 위에 호분으로 사신도를 그렸고, 남벽에는 일월상도 나타난다. 무령왕릉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되었는데, 동아시아 왕릉으로서 피장자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따라서 무령왕릉은 동아시아 능묘연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중심점 역할을 한다. 묘지가 발견됨으로써 피장자가 무령왕 부부란 점이 밝혀졌으며 이들의 사망과 매장시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로써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고분연구에서 유적과 유물의 연대결정, 고분 피장자의 신분추정에 결정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출토된 유물들은 무령왕대 백제의 국제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서, 일본산 금송을 목관의 재료로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으며, 진묘수 및 도자기 등 중국 남조와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줄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교류는 동북아시아를 뛰어 넘어 동남아시아, 멀리는 인도지역과도 교류하였음을 짐작케 하는 유물도 관찰된다. 즉 왕릉 출토 유리구슬에 사용된 납의 산지가 태국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며, 왕비 관식의 삽화(揷花) 문양은 인도 산치탑의 난간(欄干)에 묘사된 문양과 동일 계열이다.